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였다. 아하스 페르츠가 여러 가지 이교체험을 하게 되며 겪는 부분들을 읽는 것이 조금 어렵긴 했지만, 작품 후반부까지는 깊은 몰입의 상태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쿠아란타리아서‘에 나타나는 위대한 지혜, 즉 민요섭과 조동팔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리고 조동팔이 그 신을 믿고 죽어가며 외치는 마지막 말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흔히 이 작품을 기독교와, 그 신앙의 대상인 아훼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작품이라 평하는데,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하스 페르츠가 말하는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라는 말이다. 몇 보 양보해서,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쿠아란타리아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지혜란, 그 ’만들어진‘ 야훼가 줄 수 있는 아주 조금의 평안조차 제공할 수 없으며, 야훼 없이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현세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이 초라한 신을 생각해 볼 때, 민요섭이 다시 야훼에게 귀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림 1,2 ( 쿠아란타리아서가 등장하기 전까지 필자의 상태, 쿠아란타리아서 등장 이후 필자의 상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이 작품은 외화와 내화로 이루어진 액자식 구성을 띄고 있는데, 외화는 민요섭의 살해범을 추적하는 남경사의 수사 과정으로, 남경사가 조동팔과 민요섭의 행적을 더듬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내화는 남경사가 발견한 원고, 즉 민요섭과 조동팔이 창작한 소설 형식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인간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가 그가 믿었던 신인 ‘야훼’에게 회의를 품고, 여러 가지 이교체험을 하고, 나중에는 ‘신의 아들’ 예수와 대립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화는 추리 소설의 특징을, 내화는 기독교 소설의 특징을 가지는데, 전자는 완벽한 실패를, 후자는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있다.
사실 외화에 대해서는 크게 이야기할 것이 없다. 민요섭을 살해한 범인이나, 그의 살해동기는 독자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반전이라고 할 만한 부분 역시 독자에게 주는 영향이 미미하다. 반면 내화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 소설로서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현세의 삶에서 직접적인 구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기독교와 야훼에 대한 회의적 목소리를 호소력 있게 형상화했다는 점, 성서에 등장하는 모티프를 독창적으로 해석해냈다는 점 때문이다.
야훼는 어떤 신인가? 그는 사랑의 신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의 사랑을 믿어라, 그리고 나와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만든 창조자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 다시와 우리들을 구원할 것을 믿으라 한다. 그러나 그 신은 구원의 날까지 철저하게 감춰진 신이다. 그리고 감춰진 자신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큰 복이 있다고 말한다.([요] 20:29) 그러나 그 복이란 결국 ‘유예된’ 복이며, 나약한 인간존재 모두가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시대를 구원할 메시아는 야훼의 말씀의 육화가 아닌 다른 존재여야 한다고 말한다. 가짜 메시아 테도스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인간 존재의 약함과 서글픔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곳(빈민가, 노예의 작업장, 지하 감옥, 처형장)을 보여주고 그에게 강한 목소리로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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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그의 상처를 만져보는 예수의 제자 도마의 모습, 보지 않고 믿으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잘 들어라. 나는 지금 무엇인가 때가 이르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지금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단순한 말씀의 단순한 육화(肉化)여서는 아니 된다. 오는 그는 무엇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오는 그는 반드시 세 개의 열쇠를 가지고 와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가엾은 육신을 주림에서 구해 줄 빵이며, 둘째는 우리의 나약한 정신을 죄악에서 지켜줄 기적이며, 셋째는 맹목과 잔혹의 역사에 의(義)와 사랑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는 지상의 권세다. 이 셋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그는 결코 우리들의 메시아일 수가 없다. (후략)”
나약하고 서글픈 운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 그는 우리에게 빵과, 기적과, 권세를 주어야 한다고 테도스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이어받은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고 있을 때 다가와 이를 요청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접근하는 존재. 아마 성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이름은 사탄이다. ([마]4:1~4:11) 그러나 성서의 사탄은 이 작품에서 아하스 페르츠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예수에게 요청한다. 굶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빵을 제공하여 그들을 배부르게 해달라고,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기에 긴 세월을 방황하고 신음하는 인간에게 기적을 제공해달라고, 민중들이 강하게 열망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모든 요청은 말씀의 육화인 예수로부터 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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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며, 그를 꾸짖는 예수의 모습,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를 유혹하는 주체를 사탄이 아닌 아하스 페르츠로 그려내고 있다.)
이후로도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와 여러 번 만나서 그와 논쟁하지만, 논쟁의 결과는 항상 평행선일 뿐이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아하스 페르츠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예수 앞에 나타나고 한 마디 말을 남긴다. “나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기로 했소.”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겠으며, 그의 재림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는 동안, ‘인간의 아들’로서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올 예수를 이번에야 말로 인간을 위한 메시아로 만들겠다는 아하스 페르츠의 결의에 찬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의 이름대로의 삶을 획득한다. 유럽의 전설에서 이야기 되는 자, 예수의 십자가 지기를 거부한 죄로,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고향과 안식을 잃으며 끝없이 방랑하게 되는 자.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 그것이 바로 아하스 페르츠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이다. 그러나 그 전설이 이 방황하는 유대인을 죽지 못하는 운명에 괴로워하며 예수의 재림을 입증하기 위한 인물로 형상화한 것과 달리, 이문열의 아하스 페르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방랑하는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지닌 모든 미덕은 쿠아란타리아서에 와서 산산조각난다. 쿠아란타리아서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지혜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야훼와 함께 창조에 참여했지만, 야훼로부터 창조된 세상과, 창조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당한 신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미륵, 석가 창조신화에서의 미륵과 비슷한 존재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가 줄 수 있는 건 다음과 같은 말 뿐이다.
그날의 ‘하나된 우리’는 너희 믿음이나 섬김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위대하고 또 완전하므로. 번거로운 재례와 의식으로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는 너희를 우리는 오히려 민망히 여기리라.율법이나 말씀이 우리의 이름으로 너희를 찾고 간섭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지어낼 때 이미 모든 것을 주어 보냈다. 우리의 뜻을 알려고 헛되이 애쓰지 마라. 너희 영혼에 모두 담겨 있어 길어내지 않고도 절로 솟으리라.우리의 성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처럼 우리가 기뻐함을 자랑으로 삼으려 하지 마라. 우리는 너희 악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창조의 일부이므로. 선을 높이고 상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우리에게서 간 것이므로. 우리가 준 게 무엇이든 너희는 겨자씨만 한 것도 더하거나 덜지 못한다. 너희 모든 행위는 하늘에서도 땅 위에서도 아무런 빛깔이 없다. (중략) 그날에는 부질없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찾지 말아라.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아무것도 없으며,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이 얼마나 애매한 신인가! 그는 우리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의 즐거움은 우리의 즐거움이며, 그는 우리로부터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않는다. 현실과 완전하게 유리된 신! 우리에게 간섭도 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고통도 주지 않고, 우리에게 기쁨도 주지 않는 신! 그것이 바로 조동팔과 민요섭이 만들어낸 신이다. 그런데 이런 신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에피쿠루스의 오랜 질문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신은 악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할 힘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신은 무능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신은 사악하다.” 그렇다면 악을 막고자 하지도 않고, 악을 막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신은 무엇인가?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신을 믿으며 죽어간 조동팔은 무엇이라 말인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인간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인간의 길을 가려 했다면, 그는 신에게 의지하자 않고 인간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야 했다. 그럴 수 없다면 다시 ‘신의 아들’의 길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민요섭이 선택한 길처럼 말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인간의 아들’이 되기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신을 추구하는 것, 이거야 말로 모순이자 ‘인간의 아들’도 ‘신의 아들’도 아닌 길인 것이다. 그렇기에 쿠아란타리아서가 등장하는 순간, 이 작품의 모든 것은 어그러진다. 쿠아란타리아서와 그곳에 나타난 신을 믿으며 죽어가는 조동팔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이 작품의 어떤 것도 긍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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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그는
'신은 악을 제거할 의지는 갖고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는 없는것인가?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라는 신에 관해 유명한 질문을 남겼다.)
그의 신이 나에게 짜증을 불러 일으켰고, 그 짜증은 나에게 어떤 신을 생각나게 했다. 그의 이름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다. 이 신을 믿는 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이 신은 스파게티 면발 뭉치와 위로 촉수처럼 나온 눈, 2개의 미트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는 산, 나무, 난쟁이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분’은 ‘신성한 면가락’을 움직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면식의 생활화가 필수다. ‘그분’에 대한 기도는, “아멘” 대신에, “라멘(RAmen)”으로 끝내도록 한다. A는 대문자로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규율이 있는데, 그 교리 중 몇 개를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웬만하면 나를 믿는다고 남들보다 성스러운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마음 상하지 않으며, 어차피 안 믿는 자들에게 하려는 말들이 아니므로 말 돌리지 마라.
웬만하면 내 존재를 남들을 괴롭히는 핑계로 사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 같은 것들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악의에 찬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공격하려면 웬만하면 일단 밥은 챙겨 먹고 했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내 신전을 짓는데 수억금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더 좋은 데 쓸 데가 많다.
웬만하면 내가 임하여 영지를 내린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웃을 사랑하랬다. 좀 알아 먹어라.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웬만하면 남들이 너에게 해주기 바라는 대로도 남들에게 하지 마라. 상대방도 좋아한다면 상관 없다
도대체 이 신의 가르침이 위대한 지혜의 가르침과 다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더 나은 부분도 있다. 조동팔은 이름도 촌스러운 위대한 지혜를 믿으며, 소주를 마시며 괴롭게 죽지 말아야 했다. 그는 살아서 라면이든 스파게티든 짜장면이든 마음껏 먹으면서 RAmen을 외치고, ‘사람의 아들’을 자처하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해봤자 무엇하랴? 모든 것은 다 끝난 일인데 말이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짜증을 해소하고, 죽어버린 조동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를 남긴다. RAmen!
(그림 6 :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님의 천지창조를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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